Professor column
다음은 KISTI 의 과학향기에 실린 기사입니다.
“시장을 주도하는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만으로는 힘들다”
과학기술을 하는 사람들이 읽어보아야 할 좋은 기사라고 생각되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P.S. 석유값 상승으로 인해 전기에너지를 절약해야하는 시대에 비춰
다시 가스 냉장고를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
———————————————————-
1920년 냉장고는 지금보다 더 조용했다? [제 497 호/2006-09-13]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 ‘와이브로’가 미국시장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들썩 거렸다. 삼성전자와 100여개가 넘는 중소기업이 공동 개발한 이 기술을 미국 스프린트사가 도입함으로써 토종기술이 세계 차세대 이동통신 시장을 선점할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지난 10년간 CDMA 원천기술을 제공한 퀄컴사에 3조원이 넘는 로열티를 물었으니, 토종기술 와이브로가 더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이 앞서 있다고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는 가정용 냉장고 전쟁이 벌어졌다. 가스냉장고와 전기냉장고가 등장,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린 것이다. 당시 객관적인 면에서 보자면 가스냉장고가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가열된 암모니아의 기화열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던 가스냉장고는 전동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소음도 발생하지 않았고 구조도 간단해서 고장이 나더라도 정비가 용이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가스가 들어오는 집이 전기가 들어오는 집보다 훨씬 많았고 가스료가 전기료보다 더 쌌기에 가스냉장고의 압도적 우위가 예상됐다.
반면 초기 전기냉장고는 결점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냉매를 고온, 고압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전동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진동과 소음이 발생했다. 오늘날도 소리를 완전하게 잡을 수가 없는데, 초기 전기냉장고의 소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가격 역시 너무 비쌌고 전기료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석 달 동안 전기냉장고를 사용하면 냉장고 가격에 맞먹을 정도로 전기료가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조가 복잡하다 보니 덩치도 엄청나게 커서 지하실에나 설치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승부는 분명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1940년대를 기점으로 전기냉장고가 기세를 날리기 시작했고, 가스냉장고는 소형에서나 겨우 명맥을 이어갈 정도가 됐다. 조용하고, 고장이 적고, 심지어 비용도 저렴한 가스냉장고가 한 수 아래인 전기냉장고에 밀려 슬그머니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일까?
당시 가스냉장고를 제조하는 업체는 세르벨이나 소르코와 같은 중소기업들이었다. 반면 전기냉장고의 보급은 제너럴일렉트릭, 제네럴모터스, 웨스팅하우스와 같은 대기업들이 주도했다. 전기가 한참 보급되는 시절, 발전소에서부터 전등까지 만들며 전기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이들 대기업 입장에서는 전기냉장고의 성공이 반드시 필요했다. 전기를 이용하는 제품이 많아야 전기 산업을 더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기업들은 전기냉장고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성능을 개선하고 가격을 내렸다. 또 영화배우들을 활용한 전국 단위의 대규모 프로모션도 진행했다. 이러한 물량공세 결과 1940년대가 되면서 미국 가정의 45%가 전기냉장고를 소유할 정도가 됐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가스냉장고는 역사의 유물만으로 남게 됐다.
비단 냉장고 전쟁에서 뿐만 아니다. 생활필수품이 되어 버린 가전제품들 역시 이런 과정들을 거쳐 왔다. 흥미로운 것은 기술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에서 한쪽으로 표준이 정해지면, 싸움에서 이긴 쪽이 시장을 독점해버린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비디오 표준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였던 소니의 베타맥스와 제이브이시(JVC)의 브이에이치에스(VHS)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베타막스가 화질면에서 월등하게 나았다. 그러나 소니가 기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있는 사이, 제이브이시(JVC)는 화질은 낮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기기를 공급하고 영화사들을 대거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기술적으로 한수 위인 소니를 시장에서 밀어내 버렸다. 소비자들이 화질이 낮더라도 기기가 싸고 재미있는 영화를 볼 수 있는 VHS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소니의 기술은 방송용 고선명 카메라 시장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은 현재 연간 240억 달러로 추산되는 차세대 디브이디(DVD) 표준을 놓고 벌이는 싸움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현재 DVD용량을 늘린 새로운 DVD포맷을 정하자는 것인데 소니의 ‘블루레이’(Blu-ray)와 도시바의 ‘에이치디디브이디’(HD-DVD)가 그것이다. 블루레이의 저장용량 25GB는 HD-DVD의 15GB를 압도하지만, HD-DVD는 기존 DVD 설비를 활용할 수 있어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두 방식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즉 시장의 대세를 장악하는 측이 모든 시장을 거머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보니 DVD 제조업체들도 편을 갈라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이번 힘겨루기의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사들이 양편으로 나눠지고 있다. 영화수익의 50~60%를 DVD시장에서 내왔는데, 이 시장의 성장세가 추춤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로 차세대 DVD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소니 진영에는 삼성, 애플, 델, 필립스, 샤프, 파이오니아 등과 헐리우드의 거대 영화사인 디즈니와 21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등이 버티고 있다. 반면 도시바 진영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엔이시(NEC), 산요 같은 첨단 기술기업과 헐리우드의 강자인 유니버설이 합류해 있다.
지난 4월부터 8월까지의 1라운드는 HD-DVD의 판정승이다. HD-DVD가 재생기와 콘텐츠를 먼저 내놓고, 더 뛰어난 화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HD-DVD의 용량이 블루레이보다 적은데 어찌된 일일까? 이는 용량보다는 영상압축기술 때문이다. HD-DVD는 ‘VC-1’이라는 최신 기술을 써서 구형 기술인 ‘MPEG2’를 쓴 블루레이보다 좋은 화질을 보였다. 게다가 HD-DVD는 두 개의 기록층을 만드는 ‘듀얼레이어’ 방식을 써서 용량도 30GB로 높였다. 하지만 올해 안으로 블루레이가 상황을 역전할 기세다. HD-DVD처럼 VC-1 영상압축기술과 듀얼레이어 방식을 쓴 타이틀을 출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승자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면 시장을 주도하는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만으로는 힘들다는 것이다. 복잡한 정치·경제·사회적 요인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역사의 승자가 결정된다. 그러고 보면 ‘적자생존’을 외쳤던 찰스 다윈의 이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살아남는 것은 크고 강한 종(種)이 아니다. 변화하는 종만이 살아남는다.” (글 : 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